( ※ 본 리뷰는 영화를 보고 주관적으로 느낀 바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화의 일부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가타카(Gattaca)는 SF영화 탈을 썼지만 인생에 대한 영화다. 


젊었을 적에 정말 잘생긴 에단 호크


가타카의 배경은 멀지 않은 미래라고 칭하고 있는 미래 시대다. 사람들은 유전자 조작을 통해 여러가지 질병들을 임신 초기, 심지어는 배아가 수정되는 순간부터 인생을 설계해 버린다. 심장 질환, 유전적 질병, 키, 몸무게, 게다가 정신적 면모인 폭력적 성향까지 전부 조작이 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 빈센트는 소위 신이 내린 아이(Children of God)라고 불리는 부적격자다. 마치 이름만 보면 신에게 간택받은 뛰어난 아이인 줄 알겠지만 전혀 아니다. 빈센트는 유전자 조작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태어났다. 즉 지금의 우리처럼 평범하게 태어나 병에도 걸리고 키도 몸무게도 살아가면서 자연스레 바뀌는 그런 사람이다. 


영화 속에서 세상은 부적격자가 아닌 적격자, 즉 유전자 조작을 받은 사람들이 우대받는 사회다. 유전자 조작을 받지 않아 육체적, 정신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발견되면 차별을 받는 것이다. 꽤 오래 전에 뉴스를 보는데 이렇게 유전자 조작을 해서 아이를 만들 날이 머지 않았다고 본 듯 하다. 코도 높이고 눈도 크게 키워서 예쁘고 잘생기게 아이를 만들 수 있다던가. 모두가 잘생기고 예쁘고 건강하면 좋을 것 같지만 영화 속의 세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흑과 백으로 갈라진 세상은 피부색이나 부, 지위로 차별받는게 아니라 유전적으로 하자가 있냐 없냐로 모든게 갈려 버린다. 지문, 혈액, 홍채, 머리카락. 모든 부위로 신분 확인이 가능하며 속이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따라서 빈센트는 어려서부터 꿈인 우주비행사가 될 수 없었다. 부적격 인자로 분류되어 번번이 면접에 탈락되기 때문인데 동생인 안톤은 전혀 반대다. 동생은 유전자 조작을 통해 우월한 신체조건을 타고났다. 되고 싶은 건 뭐든 할 수 있었고 당연히 빈센트와 수영내기를 하면 항상 이기기만 했다.  하지만 어느 날 빈센트는 안톤에게 수영내기를 이기고 이미 정해진 유전자에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집을 나간다. 여기서부터 이 영화가 왜 SF영화가 아니라 인생에 대한 영화인지를 알 수 있다. 빈센트는 우월인자를 가진 사람의 신분을 사서 그 사람 행세를 하며 우주비행사가 돼고 결국 꿈을 이룬다. 


제롬은 휠체어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There is no gene for fate. 

- 운명을 결정하는 유전자란 건 없어.


영화에서는 운명에 굴하는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빈센트는 너무도 허약한 심장, 작은 키, 눈이 나빠서 가까운 거리에 차가 오는지 안오는지도 구분을 못할 정도로 유전적으로 타고나지 못했지만 그토록 원하던 우주에 간다. 반대로 빈센트에게 신분을 빌려준 제롬은 우월한 인자 중에서도 더 특출나게 뛰어난 유전자를 가졌는데 옛날로 따지면 왕족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는 다리가 다친 것에 좌절한 채 신분을 팔아 그나마 편하게 생활하려고 한다. 물론 그가 생각한 가장 쉽고 편한 수입원이었겠지만 그 수입원이 다른 사람에게는 금동아줄이었다. 선천적으로 뛰어나지만 역경에 굴해버린 제롬과 선천적으로 열성이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바를 이뤄내는 빈센트의 모습은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빈센트는 가진 게 없어서, 능력이 뛰어나지 못해 그 간극을 노력이라는 수단으로 메꾼다. 비록 그 수단이 불법적일지라도 단 하나의 목표, 우주비행사가 되겠다는 일념만으로 심장이 터지도록 훈련을 받고 갖가지 신분 검사도 통과한다. 단지 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는 이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정도를 넘어서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똘똘뭉쳐야 가능하다. 이렇게 노력을 할 수 있는 빈센트가 오히려 제롬보다 더 나은 유전적 성질을 가진 건 아닐까? 원래 뛰어나서 부족한 게 하나도 없다면 그 사람은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을 할까?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불완전한게 아닐까 싶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 원대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말이다. 


진짜가 진짜지만 진짜가 진짜만은 아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저렇게 까지 노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아마 목표가 확실해서지 않을까?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데 거침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I never saved the anything for the swim back. 

- 난 돌아갈 힘을 남겨두지 않아. 


다시 만난 안톤과 수영내기를 하면서 빈센트가 안톤에게 자기가 왜 자꾸만 이기는지 궁금해하는 안톤에게 내놓은 대답이다. 목표를 정했을 때 뒤돌아보지 않는다. 이게 빈센트가 그 모든 뛰어난 우월인자들 사이에서 최고로 남을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항상 세기의 천재들도 비슷한 말을 했다. 아인슈타인도 99%의 노력으로 천재가 만들어진다고 했듯이 노력을 이길 수 있는 천재는 없다. 그리고 노력을 할 수 있다는 게 다른 어떤 우월 유전자보다 더 뛰어난 유전자가 아닐까!


번외로 '가타카'는 영화 상에서 우성 인자 중에서도 특출나게 뛰어난 우성 인자를 가진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우주비행사 훈련기관이다. 말 그대로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만 걸러져서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다. 이런 곳에서 모든 경쟁자를 뚫고 빈센트는 최우수 인원으로 선발되었고 우주로 가게 된 것이다. 이 모습을 보고 제롬은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점차 빈센트가 노력하는 모습에 적극 거들어준다. 새삼 나도 저렇게 무언가 이루려고 노력한 적이 있나 생각해본다. 맨날 혼자 세운 작은 목표도 쉽사리 잊어버리고 안지키고 하지만 아직은 빈센트처럼 확고하게 원하는게 없어서라고 자위하고 싶다. 꿈이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 제롬이 빈센트에게 말했듯이 나도 꿈을 빌 수 있었으면 좋겠다. 


I only lent my body. You lent me your dream.

- 난 그저 몸만 빌려줬을 뿐인데 넌 내게 꿈을 빌려주었어.









( ※ 본 리뷰는 영화를 보고 주관적으로 느낀 바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화의 일부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다운사이징」 은 맷 데이먼 주연의 SF + 약간의 Comedy + Drama 가 섞인 영화이다. 

작아질 수 있다면?


영화의 전반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세계 최초로 노르웨이에서 인간의 몸을 1%미만으로 축소하는 기술이 성공적으로 개발되고, 


인류의 폭발적인 증가가 환경에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상대적인 소득 수준의 향상을 바라는 사람들이 몸을 축소시키는 다운사이징 시술을 받게 된다. 주인공인 폴(멧 데이먼)은 물리치료사인데 원래 꿈은 외과의사였다. 가정상황 때문에 꿈을 버리고 현실에 맞춘 생화을 하던 그는 조금 더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자 다운사이징 시술을 받게 되고 다른 다운사이징 시술을 받은 이들과 어울리며 삶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게 된다. 


「How I met your mother 」 의 히로인이였던 닐 패트릭 해리스가 깨알등장한다!


다이아몬드 세트가 8만 3천원이요...?


닐 패트릭 해리스!

 

소인국 테마파크..?

이 영화는 마치 「걸리버 여행기」 처럼 소인국 혹은 대인국으로 떠난 소재를 채용해 영화 중반부까지 실제로 다운사이징 시술을 받는 과정을 디테일하게 묘사함으로써 소재를 참신하게 잘 살렸다. 하지만 시술 과정 이후 영화의 주제는 산으로 가버렸다. 이제부터 왜 주제가 산으로 가버렸는데 얘기해 보려고 한다. (스포가 싫다면 이후 포스팅은 읽지 마시길...)


사람만한 장미꽃..!!

일단 다운사이징 기술을 개발한 노르웨이의 과학자는 인류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인류를 구원하자는 거창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물론 결국 그 과학자는 영화 마지막에 노르웨이에 최초로 개설된 소인국을 이끌고 인류가 곧 멸망하리라는 말과 함께 노아의 방주처럼 피신을 간다. 다운사이징을 받은 인류는 전세계에 3%에 불과하며 고작 3%의 인간들이 다운사이징되어서는 지속적인 환경오염으로 인한 재난이 불가피하다는 이유를 들면서 말이다. 또한 그는 굉장히 고등한 생명체(High Intelligence - 정확한 대사는 기억에 나지 않는다...얼추 비슷하게 말했다)인 인간이 멸종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며 호모 사피엔스가 빙하기에 2,000명 정도가 살아남아 지금의 인류를 이루었듯이 자기네 그룹이 사명감을 가지고 인류의 멸망에 대비해야 한다면서 지하땅굴에 정착하기로 한 것이다. 


작아서 부유해지면 좋기만 할까?

이 부분에서 나는 인간의 이중성을 잘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물론 영화를 같이 본 여자친구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인류는 20만년간 살아오면서 어느 생명체보다 빠르게 '공생'이라는 개념을 깨부수고 환경을 파괴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공산품들은 조금 과장해서 환경오염의 결과물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많다. 그렇다면 노아의 방주에 인간을 태운 것은 잘못된 것이었을까? 물론 우리들이 경이로운 생명체임은 틀림이 없다.(우리 기준에서...) 그 누구도 개발못한 기술들을 개발하고 우주까지 탐험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선 일부 사람들은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거창한 사명감을 가지고 환경 보전에 힘을 쓴다. 환경을 보존하고 파괴하는 이들이 설령 다른 이들이더라도 다 동일한 인류임에는 틀림이 없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부순 자연환경을 외양간 고치는 격으로 수리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아름답게 미화되었지만 감독은 이러한 부분을 드러내고자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또한 폴을 처음에 사람들은 '사파넥' 씨 라며 잘못부른다. (그의 풀네임은 '폴 사프라넥'이다.) 마치 「고도를 기다리며」 고도를 막연하게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에게 라고 되묻던 포조처럼. 


Godot, Godo...? 


정작 본인이 처한 주변 환경 속에서 본인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폴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제대로 이름조차 불려지지 못하는 존재로 묘사된 것이다. 


폴은 레저랜드에 와서 부유하게 생활했지만 부유함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 못하고 방황했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 결국 그는 베트남에서 반정부시위를 조직하다 강제추방된 '녹 란 트란'이라는 여성을 만나 당장 주변에 있는 불우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기 시작하면서 점점 그의 본 모습을 찾아간다. 물론 여기서 뜬금포로 이어지는 러브라인과 단순히 '착하다' 라고 표현된 폴의 성품에 의해 진행되는 스토리의 전개는 개인적으로 도대체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건지 헷갈리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분명 영화는 상대적으로 가난하게 살던 사람들이 소인국에 와서 줄어든 화폐, 상품의 가치로 인해 부자가 되자 일부사람들은 방탕하게 아무 의미 없이 즐기고만 살지만 주인공 폴처럼 진짜 삶의 목적이 주변을 둘러보고 힘든 사람들을 돕는데 있다는 착한 사람들을 대조해서 보여주어 가장 중요한 것은 주변에 있음을 강조하는 주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위에서 언급한 거창한 사명감을 가진 인간들의 모습까지 보여주며 거창해 보이는 일들보다 중요한 점은 주변을 둘러보는데서 시작된다는 느낌을 영화의 끝에서까지 주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영화보는 내내 폴의 이중성만 눈에 들어왔다. 


어색한 러브라인의 주인공들


폴은 이미 언급했다시피 가정상황으로 인해 꿈을 포기하고 여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가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제대로 이름이 불리지 못할 정도로 변두리 인간이었는데 그랬던 그가 레저랜드에 들어와 부유한 위치가 되고 나니 막상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즐기며 살던 인생이 아니였던터라 제대로 즐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결국 원래 세상에서 그가 해오던 물리치료를 주변에 아픈 사람들에게 행함으로써 그의 본모습을 찾아갔고 그제서야 그가 해오던 일이 가치있음을 알게 되면서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마치 폴은 여유롭지 못해서 주변을 둘러보지 못한 인물처럼 표현된 것이다. 


거창한 사명감을 가지지 말고 주변을 둘러보고 작은 것으로부터 도움을 실천해보라고 말하는 듯한 주제는 좋지만 부유해지고 나니 주변을 둘러보는 폴의 모습과  love f*ck보다 pitty f*ck 이라고 느껴졌던 영화 속 장면들을 보면서 좋은 소재를 가지고 표현한 방식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트남 여인 역할인 폴의 러브라인 상대 역시 도움이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가 너무 뻔뻔스러워서 오히려 반감이 들기도 했다. 


앱솔루트 1병 = 100잔, 이건 좋겠다

이와는 별개로 영화를 보는 내내 나라면 저 축소 시술을 받을까? 받는다면 정말 인류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거창한 사명감 때문일까? 라고 생각해봤다. 하지만 아직은 나름 젊고 이기적인 생각으로 똘똘뭉쳤는지 인류에 도움은 무슨 해만 안끼치고 살자는 생각이 들었고 현실에서 스스로 노력해서 얻지 못한 성취를 과연 몸을 축소해서 얻은 들 잠깐의 행복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사람마다 행복과 성취감을 느끼는 기준을 다를 것이다. 개인적으로 작은 목표를 하나하나 끝내는데서 성취감을 얻는 나로써 몸이 작아져 상대적으로 커진 사물들의 가치에 부자가 되버리면 일상이 너무 재미없을 것 같았다. 내 힘으로 이룬 성과가 아닌 공짜는 성미에 맞지 않는다. 땀 흘려 번 돈이 쓰기가 어렵듯이 노력의 대가로 다가오는 이득이 내게 진정한 성취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초반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신선한 시술모습을 묘사한 점과 거대한 비스킷을 시술 선물로 건내받을 때까지만 해도 흥미진진했지만 이후에 허황된 사명감과 서투른 러브라인, 너무 이중적이여서 어색한 폴의 모습 때문에 재미가 반감되다 못해 산으로 가버렸다. 아쉽게도 올해에 좋은 소재를 살리지 못한 대표적인 영화 다운사이징 이었다.


올해의 팩폭담당

P.S 깨알같이 등장한 두샨(크리스토퍼 왈츠) 

little pathetic!

이라고 말하며 폴의 잣대를 제대로 팩폭해서 세상의 진짜 모습에 대해 언급하는 가장 일관된 인물이었다. (물론 「나쁜녀석들」에서부터 인상깊은 독일군 장교의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다. 안보신분 있으면 꼭 보시길...크리스토퍼 왈츠는 악역 연기의 신이다!) 






※본 리뷰는 영화를 보고 느낀 점을 주관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화 줄거리 일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하게 태어난다고 주장하는 성선설이 있다. 

본래 본성이 선하지만 여러 경험이 쌓여서 범죄를 저지르고 주변 환경에 의해서 타락해 진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어떤 환경에서 인간은 가장 추악해질까?


사실 인간 본성이 선한지 악한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하지만 극단적인 상황, 특히 전인류적인 재앙을 맞이할 때 인간들은 살아님기 위한 생존본능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이때 인간들은 그저 본능에 의해 먹잇감을 사냥하는 맹수처럼 난폭해지거나 극단적으로 잔인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을 가정해서 많은 재난영화들이 탄생하였고 좀비물도 그 일환으로 탄생하였다. 좀비물을 포함한 재난영화들은 인류 혹은 주인공들이 맞이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고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갖가지 선택을 해야 하는 등장 인문들의 고뇌를 테마로 삼는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자연재해가 덮치는 재난영화보다 좀비 혹은 인간의 힘으로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이 나오는 영화가 표현이 더 극단적인데 이러한 영화는 몇가지 공통점을 갖으며 이를 통해 주제를 드러낸다. 


  • 주인공 그룹이 극단적인 상황에 처해 동료를 구하거나 버려야할 상황을 맞이한다.

  • 선택의 상황에서 고뇌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그린다. 

  •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당하기만 약자들이 등장한다.

  • 이기적인 인간상을 드러낸다. 

  • 권선징악적인 내용이 포함된다. 


특히 좋아하는 좀비물인 「28일 후」 에서 초반부에 도망가는 남편은 대표적으로 이기적인 인물의 모습인데, 가족들을 버리고 혼자 살아남기 위해 전력을 다해 집과 반대방향으로 달리고 또 달린다. 자기 목숨만 살고자 했던 그는 결국 후에 좀비가 되고 만다. 마찬가지로 다른 많은 재난영화에서 자기 목숨만 살고자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등장인물들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게 정석이다. 이는 나쁜 일을 저지른 사람은 나쁜 결과에 처해진다는 권선징악적 주제를 내포하면서 나름의 삶의 정설을 포함시키려는 의도로 보이지만 오늘 본 영화 「캐리어스」는 조금은 신선하게 테마들을 표현했다. 


영화의 설정은 다음과 같다. 

  • 인류의 대부분이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해 죽었다.

  • 바이러스는 호흡기를 통해서도 감염이 된다. 

  • 감염이 되면 몸에 멍이 생기며 독감같은 증상을 보이다가 피를 쏟기도 하며 치사율이 100%에 육박한다. 

  • (유추한 내용) 표백제 같이 강한 소독제로 살균을 하게 되면 감염되지는 않는다. 


첫 장면에서 세상은 뒤집힌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예일대 입학을 앞둿던 대니, 그의 형이면서 전직군인(?)인 브라이언, 브라이언의 여자친구 바비, 대니가 좋아하는 여자사람친구 케이트, 4명이다. 


이들은 대니와 브라이언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어느 해변의 별장으로 향하고 있다. 


큰 도로도 피하고 샛길로만 다닐 정도로 감염자들을 만날 상황을 극단적으로 차단했는데



차가 고장나면서 초반부에 그들의 차를 탈취하려 했던 프랭크와 그의 딸을 새로운 혈청이 개발중인 지역으로 데려다 준다는 조건 하에 그의 차를 인계받는다. 프랭크의 딸은 감염된 상태라서 브라이언은 호시탐탐 프랭크와 그의 딸을 버리고 갈 생각만 한다. 왜냐하면 처음 차를 타고 있던 4명은 그들만의 생존 룰이 있기 때문이다. 


브라이언이 달고 사는 말로써, 

감연된 자는 죽은 자다.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 가족도, 연인도 감염되면 죽은 자일 뿐이다. 


감연된 사람들을 극도로 꺼리는 브라이언은 감염자와 한 차에 있게 되자굉장히 신경질적으로 군다. 



하지만 동생과 연인이 함께 움직이는 상황에서 룰과 어긋나는 행동을 취할 수 밖에 없는 브라이언의 행동이 비록 가족이 아닌 남들에게는 이기적으로 비칠지언정 안전을 위한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혈청이 있는 도시에 도착하지만 혈청은 단지 감염을 늦출 뿐이고 치사율을 낮춰주진 않는다. 프랭크는 상황을 알게 된 브라이언이 떠날까봐 자꾸만 급하다는 딸보고 화장실에 혼자 다녀오라고 하지만 쓰러지는 딸을 안고 함께 화장실에 가게 된다. 자꾸 브라이언의 눈치를 보는 프랭크의 모습을 보면서 자식을 가진 부모의 모습은 어느 상황에서나 똑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는 딸이지만 바로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어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아버지가 차를 가져가버릴게 확실한 남을 뒤로 하고 자식을 챙기는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동시에 인간미 없는 브라이언의 모습을 보면서 브라이언도 동생이라는 가족을 위해 저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겠지라는 생각을 했는데 아버지와 딸도 하나의 가족이고 브라이언과 대니도 하나의 가족인데 누구의 편을 들어야 옳은건지에 대해 고민에 빠지게 한다. 영화는 이렇게 답을 선뜻 낼 수 없는 장면들을 통해 극단적인 상황에 빠진 인간의 모습들을 하나하나 부각시킨다. 



다시 해변으로 향하던 중 들린 버려진 골프리조트는 알고 보니 이미 점거한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그들 나름의 규칙을 만들어 감염자들과 접촉을 피하고 자원을 수급함으로써 생존을 유지해왔기에 브라이언 일행의 침입을 극도로 경계한다. 결국 브라이언 일행을 쫓아내려 하면서 여자들은 두고 가라고 한다. 리조트 세력 사이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된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고 과거 그들의 상사였던 인물은 여자들을 보내주라고 하지만 그를 제외한 세력들이 반발하면서 여자들한테 옷을 벗으라고 명령한다. 이 때 바비가 프랭크의 딸로부터 감염된 상태가 드러나고 브라이언 일행은 그대로 쫓겨난다. 


극한 상황에서 순간의 이익만을 좇는 인간상은 여느 재난영화에서 등장한다. 특히 여성들보다 힘이 강한 남성들이 일반적으로 그들이 가진 힘을 남용하는 경우가 빈번히 보인다. 일반적으로 도덕과 규범이라는 사회적인 규칙에 의해 남성들의 육체적 힘의 행사가 제어되고 있었지만 그러한 규칙이 무너지고 나면 사회는 말그대로 Chaos 혼란상태로 빠진다. 그렇다면 현대사회는 영화에서 제시되는 극단적 상황 속에서 인간들의 군상처럼 선하게 태어난 본성이 아니라 본래 악한 본성이 사회적 규칙에 의해 제지되고 있는 상황이 아닐까? 왜 사람들은 규범이 무너지는 순간 육체적이고 본능적으로만 행동하게 되는걸까? 



인간의 역사가 다윈의 진화론에서 이어졌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진화를 거친 인간들 역시 잣대가 없는 세상에서는 그저 말하는 동물에 불과해져버리고 만다. 실제 상황에서 이토록 잔인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브라이언 역시 이기적이고 육체적 쾌락을 좇는 인물로 표현되었다. 반면 그의 동생인 대니는 형과는 반대로 이성적인 판단을 하려고 노력하며 극한 상황에서도 기독교 교리로 대표되는 사회적 잣대를 언급하면서 여전히 규범 속의 인간처럼 행동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대니도 알고 보면 사람들에게서 물건을 빼앗고 냉정해져야만 하는 상황에서 형의 행동을 묵인하면서 정작 본인 손은 더럽히지 않는 위선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런 대니는 영화가 후반부로 치닿을수록 브라이언과 비슷해지면서 결국 형이 감염되자 형을 쏘기에 이른다. 대니 역시 브라이언처럼 자신의 생명만 지키면 되는 동물과 같은 인간상으로 추락한 것일까? 


디스토피아(Dystopia) : 역 유토피아적 세상, 가장 암울하고 부정적인 세상의 모습을 그려낸 곳.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는 영화 첫 시작 때 나온 형제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끝이 난다. 결국 대니는 해변가에 여자친구와 함께 도착했지만 그토록 서로 아끼고 좋아했던 형제끼리 도착하지는 못했다. 형제를 버리고, 연인을 버려서 도착한 끝에 남은건 무덤덤해진 마음 뿐이다. 




바이러스가 주된 소재로 등장하면서도 좀비와 같이 자극적인 요소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면서 극단적 상황 속에서 서로에게 잔인해져만 가는 인간상을 각 등장인물의 시선에서 디테일하게 잘 풀어낸 영화가 아닌가 싶다. 


영화를 보는내내 내게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되었는데, 


내 연인이 감염된다면..?


재난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버리지 않는 인간이 될 것인지, 내 목숨을 지키기 위한 본능을 중시 여기는 인간이 될 것인지는 각자의 판단이 될 것이고 서로 다른 선택을 한 이들끼리 비난한다해도 결론은 나지 않겠지만 우선시 되야 할 것은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영화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버리고 기름을 탈취하기 위해 사람마저 죽이는 브라이언의 모습을 담은 장면..


사회는 비극속에 빠져 있는데 주변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 대비가 너무도 극명해서 개개인이 아무리 힘들도 힘들어도 그저 무덤덤하게 돌아가는 삶의 괴리를 보여주는 듯 했다. 



연인 바비를 버리고 가는 길에, 브라이언이 뱉는 한 마디가 떠오른다. (영화가 시작할 때 바비와 장난치면서 뱉던 대사와 동일하다.)


Warm beer. Tastes like piss.


이미 식어서 맛없게 되어 버린 맥주처럼 중요한게 빠져버린 삶이 과연 맛잇을까? 

( ※ 본 리뷰는 영화를 보고 주관적으로 느낀 바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화의 일부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우주비행사들의 고난과 역경을 그린 우주와 관련된 SF영화들은 평소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특히 1998년 작의 「아마겟돈」 같은 미국 영화는 미국의 영웅주의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냉전 이후, 우주 개척을 선점하려는 소련과의 첨예한 대립 구도를 보이던 미국의 애국심을 불태우는 영화의 표본입니다. 


반면 오늘 시청한 영화 「스테이션 7」 은 러시아 영화입니다. 평소 러시아 영화를 자주 접해보진 않아서 나오는 호기심에 영화를 틀었지만 정서에 안맞으면 어떻하지 라는 불안감이 섞인 채 플레이한 영화입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미국 영웅주의 영화들과는 다르게 각 주인공들의 섬세한 감정표현과 주변 인물들의 감정선까지 알뜰하게 보여준 수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산드라 블록 주연의 SF재난영화인 「그레비티」 제작비의 1/10도 쓰지 않았다고 하는데 표현력까지...어색하지 않고 깔끔합니다.)




시작부터 영화는 적절한 긴장감을 제공합니다. 긴장감 속에서 천사를 보았다는 블라디미르, 과연 그가 본 것은 정말 천사였던 걸까요?


스테이션7


러시아는 고장난 우주정거장을 고치기 위해 한 명의 엔지니어와 또 한명의 은퇴한 우주비행기 조종사를 우주로 올려보냅니다. 이 두명은 각자의 분야에서 단연 최고라고 꼽히는 인물들입니다. (얼마나 조종을 잘하는지 초속으로 회전하는 우주정거장에 도킹까저 성공시켜 버리는 주인공...;;) 


스테이션7


「스테이션 7」은 고장나서 물로 가득 차버린 우주정거장을 고치기 위해 고군부투하는 두 인물의 고난과 그 속에서 겪는 감정을 잘 표현한 영화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우주로 떠나버린 주인공들의 가족들과 이들을 걱정하고 조국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내려야만 하는 러시아 기지에서의 갈등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헐리웃 감성에 젖은 미국 영웅주의 영화들보다 좋았던 점은 그 감정선이 우리나라의 것과 비슷하다는 겁니다. 

과장되게 웃기려는 대사도 없고 거짓된 표정과 대사도 없습니다. 


스테이션7



2명 다 지구로 귀환하기에는 산소가 부족해서 1명만 돌아오라는 러시아 기지의 무전에 갈등하는 블라디미르.


하지만 그런 블라디미르에게 아내는 


'돌아와' 


이 한마디만을 말하고 퇴장합니다. 러닝타임 중에서 10분 남짓이나 비치는 그의 아내이지만 그녀가 던지고 간 한마디는 영화를 다 보고난 이 순간까지도 여운이 남습니다. 


두 빵 사이를 가득 채우는 두꺼운 패티와 기름진 야채들로 버무려진 햄버거와는 다르게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군더더기가 없기 때문일까요.


어느 아내가 가족과 자식들을 내팽겨치고 우주로 가버린 가장에게 영영 보지 못할 그 짧은 순간에 전하는 말이 원망하지 않고 살아서 돌아오라는 한마디일 수 있을까요? 정말 당신이라는 사람을 믿기 때문에 그 말 한마디만 하고 뒤돌아서 갈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패닉에 빠져 환청을 듣은 빅토르의 공황상태마저 '쟤 왜저러지?'라는 생각보다 '정말 저럴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만큼 표현도 과하지 않습니다. 


스테이션7



영화에서는 조국을 위해 2명이 있는 우주정거장을 그냥 격추시켜버리자는 정치가들의 압력도 보여집니다. 미국에게 정거장을 넘겨 첨단 기술을 뺏길 바에는 터트리자는 겁니다. 그리고 2명 중에 1명에게만 귀환명령을 내리는 러시아 정부. 하지만 지구에 있는 정치가들은 어떤 권리로 살고 죽을 사람을 결정할 수 있을까요? 


그 순간에도 서로 함께 살자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주인공들을 보면서 저런 상황에서 믿음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서 사회가 진보하지 않나 생각해보게 됩니다. 


영화의 목적 자체는 러시아의 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지만 그 속에 많은 삶의 모습들을 담고 있는 담백한 영화였습니다.


스테이션7



2시간이나 되는 러닝타임동안 잔잔하게만 흘러가는 영화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게 생각하면서 흘러가는 SF영화 「스테이션 7」 입니다. 



P.S 블라디미르가 우주에서 죽을 수 있는 순간에 보았던 섬광과 같았던 천사의 모습은 포기하지 말고 살아가기 위해 눈앞에 보여진 희망이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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